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2세 (문단 편집) == 말년 == 헨리 2세는 자신의 생각대로 영지를 분할하고자 했었다. 2남인 [[청년왕 헨리]][* 장남 기욤은 3세 때 [[요절]]했기에 실질적으론 첫째였다.]에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3남인 [[리처드 1세|리처드]]에겐 [[아키텐]]을, 4남 [[조프루아 2세|제프리]]에겐 [[브르타뉴]]를[* 정확히는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랑 결혼시켰다.] 물려줄 생각이었다. 아일랜드 정복 전까지 존은 상속분이 없었고, 이것 때문에 훗날 '''결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헨리 2세는 존을 많이 아껴 그에게 물려줄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침공해 영지를 획득했다. 왕은 청년왕 헨리를 [[공동왕|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고]], 공동으로 순회를 도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후계를 탄탄히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결코 아들에게 [[실권]]을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년왕 헨리는 자신의 기사들에게 제대로 봉급조차 주지 못했고, 아버지의 계속된 간섭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권력에 대한 욕구가 점차 부자간의 갈등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잉글랜드를 꺾고 싶었던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를 꾀어서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유도했다. 사실 이 꼬드김보다는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부추김이 더 컸다. 당시 엘레오노르는 남편인 헨리 2세와의 좋지 못한 결혼 생활과 남편의 [[바람(관계)|바람기]], 정치적 갈등으로 헨리 2세에게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엘레오노르는 청년왕 헨리 뿐만 아니라 [[리처드 1세|리처드]]와 [[조프루아 2세|제프리]]에게 권력 분배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그런 상황에서 루이 7세까지 끼어들자 3명의 불충한 아들들은 프랑스의 궁정으로 갔고, 곧 아버지를 향한 반란을 개시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의 반란에 충격을 받고, 분개하면서도 노련하게 대응했다. 노르망디를 향해 세 갈래로 몰려오는 반란군을 모두 격파하고는 오히려 세 아들들 모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헨리 2세는 여기서 멈추며, 아들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했고, 결국 3명의 아들들은 항복했다. 또한 루이 7세는 쓴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엘레오노르는 이 반란 중에 헨리 2세에게 붙잡혀서 감금당했는데 헨리 2세가 사망하고서야 풀려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형제들 중 가장 어렸다는 점도 있겠지만, 어쨌건 막내아들 [[존 왕|존]]만이 이 대반란에 합류하지 않고, 헨리 2세의 곁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헨리 2세는 자식들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존만을 편애했다. 물론 [[마그나 카르타|결말은...]] 대반란 이후 청년왕 헨리는 여전히 권력 분배가 되지 않고, 아버지의 간섭을 받으며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다시금 반란을 준비했다. 하지만 곧 [[이질|병]]에 걸려 사망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사면을 구했다. 헨리 2세도 아들의 마지막 부탁은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병사했다. [[리처드 1세|리처드]] 또한 이 대반란으로 상당히 찍힌 것으로 보인다. 어쨌건 그렇게 화해하고 난 뒤에도 아들들끼리 신나게 쌈박질을 해댔다. 서로 부유한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청년왕 헨리]]와 [[조프루아 2세|제프리]]가 각각 [[리처드 1세|리처드]]와 신나게 싸워대다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청년왕 헨리는 이질로 급사해버리고, 제프리 또한 병으로[* [[마상창시합]]에서 [[낙마]] 사고를 당했단 [[소스#s-2]]도 있다.]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헨리 2세가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리처드와 또 다투게 되었는데, 리처드는 "아키텐은 어머니가 물려주는 건데, 아버지가 왜 간섭이냐?"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특히 아키텐은 리처드가 자란 [[고향]]인터라 그는 이를 소중히 여겼는데, 헨리 2세가 이를 멋대로 존에게 주겠다고 선언하자 리처드가 반발한 것이었다. 리처드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2세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이번 싸움에서는 헨리 2세 쪽이 수세에 몰렸다. 결국에는 어찌어찌 화해했지만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대립을 멈추고, 십자군 참전을 준비하려 했으나 의견 차이로 휴전은 결렬되었다. 어쨌건 양국은 대립과 함께 참전 준비를 하는데... 아키텐을 둘러싸고 헨리 2세와 3남 리처드는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었다. 헨리 2세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 아들인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 했고, 리처드는 아키텐의 지배권을 꽉 쥐고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등극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또 아마 예전부터 쌓인 것들이 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리처드의 약혼자인 아델을 가로챘다는 의혹이 있지만 가장 큰 불화는 리처드가 부친에게 모후 엘레오노르의 긴 연금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었고, 이 문제로 아버지와 크게 다투었다.]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고, 헨리 2세는 그들의 협공에 쫓기며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어가던 즈음, 그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큰 충격이 찾아왔다. 바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 [[존 왕|존]]마저''' 휘하의 부하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의 편에 선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가뜩이나 [[궤양]]으로 건강이 나빴는데 홧병으로 악화되었다.[* 특히 사망하기 직전의 날씨가 7월의 더운 여름인지라 더위로도 고통받았다.] 헨리 2세가 이 사건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죽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권하자 >[[악의 문제|"어째서 내게 고통만을 안겨준 하느님에게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라며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말, 정말 내 아들 존이란 말이더냐? 내 아들들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이란 말이더냐? 내가 지금까지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게 누구 때문인데, 그 존이 나를 배신했단 말이더냐? 더 이상 아무 말 말라. 이제는 모두 내려놓겠노라. 짐은 물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이제는 마음 쓰지 않겠노라." 결국 [[1189년]] [[7월 6일]]에 풍운아 헨리 2세는 시농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죽어가는 헨리 2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서자인 제프리[* 적4남 [[조프루아 2세]]가 아니다. 저 당시 제프리 2세는 이미 죽은 뒤였다. 당시 성직자였지만 전쟁터에 참전하며 전투 경험이 있었기에 아버지의 편에 서서 국왕군의 기사로 활약했다.]와 충성스런 심복 [[윌리엄 마셜]]뿐이었다.[* 유일하게 믿었던 존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절망에 빠져있었던 헨리 2세는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키고 간호하던 서자 제프리를 보고는 "너야말로 나의 진정한 아들이구나!"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특히 헨리 2세는 죽기 전에 제프리에게 소원을 물었을 때 제프리가 [[요크]] 대주교가 되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인장으로 직접 그를 요크 [[대주교]]에 임명한다고 하여 칙서까지 작성해주었다. 헨리 2세 사후 리처드 1세도 이를 보고는 그대로 허락해주어 제프리는 요크 대주교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시신을 보기 위해 방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헨리 2세의 시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헨리 2세가 리처드를 저주하며 죽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